본문 바로가기
글쓰기/아침의 피아노 필사+생각정리

아침의 피아노, 네번째 이야기

by Ateambulo 2021. 8. 21.
728x90
반응형

이 내적인 무기력을 신학은 나태라고 부른다. 나태는 장세니스트들에게 가장 불온한 죄악이었다. 그건 시만이 아니라 자기의 신뢰를 잃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나태함의 정의라면 내 인생 자체가 나태함 단어 그 자체다. 무슨 일을 시작하면 열정도 타오르지만 동시에 무기력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는 내가 끈덕짐이 없고, 빨리 질리는 사람이라 믿었다.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건 사람과 연애를 할 때 처음 느껴봤다. 질리지 않았고, 지루함, 무기력함도 없었다. 여기서 나는 내 인생을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고,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지 않아서 나태함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나태함은 이제 내가 나를 사랑하는가? 삶을 사랑하고 있는가? 질문으로 현재 내가 사랑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척도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나태하지 않다. 평온하다.

고요함은 관대함이고, 관대함은 당당함이다.

 

요즘 우리는 소리가 없는 곳을 찾기 어렵다. 쉴때도 유튜브를 보고 있고나, 음악을 듣거나, 심지어 잘 때도 불면증인 사람은 잠을 자기 위해 asmr을 들으면서 잔다. 왜 우리는 고요함을 유지할 수 없을까? 불안과 여유가 없어서가 아닐까? 여유가 있다면 난 차분할 거고, 고요함을 즐길 거다. 나로 충분하니까. 마음에 가득 채워진 에너지는 부족한 것이 없으니 꿀릴 것 없고 당당하다. 여유를 가져보자. 몸이 아닌 정신의 여유.

선생님은 비상사태예요. 그렇게 슬프거나 울적할 시간이 없어요, 라고 그는 나를 탓한다. 그가 옳다. 나는 존재의 바닥에 도착했다. 단독자가 되었다. 본질적 타자성의 존재가 되었다. 이제 나는 내 삶을 혼자서 다 껴안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이토록 무거웠던가.

 

존재의 바닥은 혼자다. 아무도 같이 가주려하지 않는다. 자의든 타의든 눈앞에 바닥에 도착하면 헐벗은 나를 본다. 내가 나를 감당한다는 건 모든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행동 하나하나에, 선택에 나를 짊어지고, 끌고 가야 한다. 지금까지 난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지탱해준 사람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내 무게를 분배해서 책임지고 있었다. 이제는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 갑자기 내 무게를 실감하느라 움직이는 게 굼뜰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적응해서 무게를 잊고 살아갈 거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누군가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겠지.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