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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18.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집은 당신에게 어떤 공간인가?

by Ateambulo 2021.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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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영 작가의 책은 처음 읽어봤다. 집이라는 주제의 에세이라니 어떤 글을 썻을지 궁금했다. 작가에게 집이 어떤 공간이었길래 긴 글로 풀어냈을지 책을 들여다 보고 싶었다.

 

집은 우리에게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집이 쉼터이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집은 일터가 되었다. 보수도, 출퇴근도, 휴일도 없이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가사노동의 현장 -p. 26

나도 이 노동을 20대가 와서 깨달았다. 할머니는 매일 닦고, 쓸었다. 왜 매일 하실까? 이해가 안 되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쓰러졌을 때 알게 되었다. 남은 가족의 편의와 행복을 위해 우리가 집에다 털어놓은 찌꺼기들을 매일 없애고 계셨다. 쌓일 리 없다고 생각한 먼지들이 발에 밟힐 때까지 몰랐다. 왜 이렇게 쌓였지? 하고 스스로 청소를 처음 한 날까지 뭐 이 정도면 깨끗해졌네라는 느낌만 들었다. 다음날 먼지가 또 쌓여있었다. 어제 내가 청소했던 자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또 있어? 저기도? 그렇게 매일 청소를 시작했다. 허리도 아프고, 먼지 때문에 알레르기도 심해졌다. 그 불편함을 맛보았을 때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매일 이 방 저방에서 구석구석 치우던 할머니의 흔적이 침대에, 책상 모서리에 남겨져있었다. 할머니의 희생 덕분에 우리 집이 유지가 된 것이다. 현재는 할머니의 몫을 분담한다. 엄마가 하시는 일이 많아졌고, 청소는 내가 하고, 빨래는 다 같이 널고, 분리수거는 오빠가 한다. 이제는 모두의 몫이다.

가난은 서로에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월세 30만 원짜리 자취방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포클레인이 밀어버릴 쪽방이었다. 누군가에게 가난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지 못한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가난은 거리로 내몰린 노숙인의 삶이었다. 가난을 가늠하는 일은 자신의 과거든 타인의 현재든 비교 대상이 필요했다. 마포의 30평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을 다녀온 날, 나는 가난했다. 원룸에서 불과 몇 정거장 떨어진 난곡의 쪽방을 목도한 날, 나는 가난하지 않았다. -p. 58

나는 만족을 몰랐다.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도 가난하다. 뭘 해도 나의 모난 부분만 보이고, 내가 가지지 못한 물건만 보인다. 이런 나에게 도움을 준 트렌드가 있었다. 바로 미니멀 라이프다. 쓸모없는 잡다한 것들을 버리니 소중한 것만 남았다. 물건을 버리면서 아픈 추억도 덤으로 버렸다. 힘들었던 중, 고등학교 때 물건을 버리면서 상처의 고름을 짜냈다. 이제 난 어떤가? 빈 공간인 마음에 뭐라도 채워야 하나 싶을 정도로 허전했다. 지금 당분간은 텅 빈 그 자체의 고요함을 즐기고 있다. 마음에 홍수같이 10동안 휘몰아쳤으니 그 자리에 새로운 새싹이 자라고 있을 거다. 열매를 맺을 때의 풍요를 맛볼 때까지 나는 조용히 기다려야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을 버리고 쓸모 있는 노동자로 살자고 다짐했을 때, 나는 비로소 서른 살이 "스스로 젊다고 내세우는 게 어색해진" 이 나이가 되었다. 대가가 주어지는 일을 하고, 나의 일로써 나의 삶을 영위하며, 집다운 집에서 살겠다고,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나도 욕망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순간이었다. -p.93

실수와 오류와 시행착오 사이에서 분투할 때마다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자기 돈과 시간을 써가면서 아등바등 집을 고치고 있단 말이야?"

'아등바등'이라는 표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무언가를 이루려고 부단히 애쓰는 모양새'라는 의미였다. 돌이켜보니 아등바등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사는 것을 비참한 일로 여기면서 건성으로 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가족들은 나의 몫까지 아등바등 살았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몸부림을 밟고서 서울행 기차를 타고, 학교를 다니고, 집을 구하고, 글을 썼을 것이다. 내가 지낼 공간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힘을 쓰는 시간은 처음으로 스스로를 책임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순간이었다.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이 집이 온전한 나의 집이 되리라고 믿었다. 내가 바꾼 공간이 이곳에서 보낼 나의 시간을 바꾸리라 기대했다. 그렇게 일상의 모든 것이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아등바등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절박하게 애쓰지 않으면 나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집을 고치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p.104

나는 아등바등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확언할 수 없다. 애써도 어딘가 계속 부족해 보이고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나의 결과가 점수로 표현되는 것들이 그렇다. 최고점이 정해져 있다 보니 그 점수가 아니면 나의 부족으로 깎여나간 나의 모자람이 드러난다. 내가 중, 고등학교 때를 싫어한 이유가 발견되었다. 주변에서는 나의 노력이 부족하다 그랬고, 그걸 믿고 부단히 애썼다. 애써도 결과는 노력을 배반할 때가 많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횟수 더 늘었다. 늘어갈수록 애쓰지 않으려고 했고,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세상 탓, 나라 탓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노력을 하면 확률이 올라가기라도 하니까 노력은 하고 어떤 결과가 나와도 받아들이기로. 아직 나의 때가 아닌가 보다. 아님 이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로 가야 할 때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니 여유로워지고, 무엇보다 나에게서 문제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나로 충분했다.

관계에 소극적이던 내가 범준에게 먼저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에게 의존적이었던 이전과 달리 혼자여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혼자여도 괜찮았으므로 거절당해도 괜찮았다. -p.115

3년을 넘게 사귄 사람과 헤어지면서 한 가지 깨달은 건 서로 만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둘 다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나는 나 혼자 열심히 그 사람을 가꾸고 있었다. 이미 한 번의 위기가 일 년 전에 왔음에도 노력하면 바뀌겠지라는 마음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은 이미 잡초로 가득해져 양분을 다 뺐어버려 나도 힘이 없어졌다. 헤어질 때 눈물 한 방울도 안 나오던 이유였다. 오히려 화가 났다. 시간 낭비를 얼마나 한 건가 싶었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쏟아도 모자랄 시간을 아깝게 보낸 것 같았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그랬기 때문에 나를 아낄 방법도 알게 되었으니까.

나는 디킨슨이 자신이 바라던 대로 방 안에서 자유로웠으리라고, 적막하지만 활화산처럼 폭발적인 시간을 보냈으리라고 짐작한다. 누군가는 집 안에 길이 있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집 밖에 길이 있다고 하지만 나에게 두 문장은 다르지 않다. 몸을 집 안에 두고도 세계를 유랑하는 이들이 있다. 디킨슨처럼 아무 데도 가지 않은 여행자들. 먼 곳을 떠도는 은둔자를 나는 흠모한다. 나의 방 - 작업실 - 서재가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이자 외부로 나가는 길이기를 바란다.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디킨슨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이제 자유야." -p.194

작가의 말이 건조했다. 건조해서 갈라진 틈 사이로 보이는 상처가 더 아프게 느껴졌다. 그 상처에서 나의 상처도 발견했다. 작가의 글은 나에게 상처를 회복하고,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오랜만에 공감하면서 읽은 에세이고 이 책을 발견한 것에 기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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