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다는 말을 읽으면서 어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작가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할 정도로 개그코드와 혼자만의 고독에서 나오는 생각들이 나의 마음을 건드렸다. 살짝의 삐닥선을 타는 작가와 마음이 살짝 삐둘어진 내가 공감대가 만들어진 독서는 필사를 하게 만들었고, 그 밑에 나도 할 말이 많았다.
세상이란 초등학생들의 기대처럼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자라난다는 건 내일의 세계가 오늘의 세계 보다 더 나아진다는 걸 믿는 일일 텐데, 세상이 이 모양이라는 걸 아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라기가 좀 힘들어진다. ' 이 세상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그냥 존재하는 거야. 존재란 그냥 존재하는 것이지, 좋다고 말해서도, 나쁘게 말해서도 안 돼, '
어릴 때는 내가 뭐라도 될 줄 알았다. 적어도 엄청난 명예를 가질 줄 알았고, 뭔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 커가면서 생각해보니 나는 그저 큰 우주의 생활에서는 그냥 1초도 안 되는 시간이다. 큰 의미가 없고, 그냥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내 삶은 뭘까? 사명감이 필요할까? 등 모든 게 허무해졌다.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다 보니 왜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삶을 살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대게 어른들이 그런 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 위주로 생활하면 인생에서 후회할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늙을수록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해야 한다.
이 글 보고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 건 나뿐인가? 어른들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계속 미루면 정말 미루기만 한다. 그럴 바엔 뭐라도 저지르고 본다. 주변에서는 너무 여러 가지를 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지금 안 하면 계속 안 할 것 같아서 무작정 시작하고 보는 거다.
샐리는 줄넘기를 하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 왜 그래?' '난 줄넘기를 하고 있었어, 모든 게 괜찮았는데 갑자기 다 부질없어 보였어' 내 생각에 청춘의 시간이 꼭 그렇게 흘러간다. 열심히 뭔가에 빠진다. 그다음에는 갑자기 다 부질없어 보인다. 왜 20대에는 제대로 산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고, 모든 게 갑자기 부질없어 보일까? 그건 어쩌면 20대에는 결과는 없고 원인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20 대란 씨 뿌리는 시기이지 거두는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청춘이란 단어에 '봄'의 뜻이 들어가는 건 그 때문이겠지. 20대에 우리가 원할 수 있는 건 결과가 아니라 원인뿐이니까.
나도 20대 현재는 나에게 투자해야 하는 시가야 하면서 눈 앞에 바로 나오지 않는 결과 때문에 답답해한다. 아마 내가 계속 자격증을 따는 이우가 빠른 결과 때문이었으리라. 몇 달 이란 적은 투자만으로 '합격' 이란 글자를 얻을 수 있으니까. 이 글자가 가져다주는 행복은 얼마 못 간다. 이것 또한 씨를 심는 과정일 뿐이다. 현재 21세기의 20대들은 진정 청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뿌릴 씨조차 없는 청춘들이 더 많지 않을까? 밭에 가서 뿌릴 시도 없는데 물만 뿌리고 있는 거 아닐까? 아니 내가 씨를 가지고 있는 건 알고나 있는 건가? 봄이 오면 자라날 새싹이 있을까? 사실 우린 잡초를 키우고 있는 게 아닐까. 잡초도 크면 꽃도 피고 이쁘다. 다만 내가 뿌린 씨앗인 줄 알고 착각하는 청춘이 많겠지.
우리 인생에도 무자비한 사주가 있다면, 그건 계획을 세울 때의 '나' 즉 '갑의 나'다. 그러나 막상 실천할 때가 되면 우리는 '을'의 처지가 되어 갖은 푸념을 다 늘어놓는다. 왜 일을 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수천 가지도 더 댈 수 있다.
익지 않은 밤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여름 내내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나름대로 익었다고 생각해서 바닥에 떨어진 녀석인데. 그렇게 말하기는 좀 미안했다. 그러니까 제대로 익지 않았다기보다는 제 방식대로 익었다고 말해야겠다. 그럼 이 녀석의 방식대로 익는 건 어떻게 익는 것일까? 우리도 모두 나름의 방식대로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겠는가?
을의 처지가 된 내가 갑을 달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아님 갑 따윈 신경 쓰지 않거나. 아님 갑자체를 없앤다. 항상 갑의 나는 매일의 나를 채찍질했다. 생각해보니 을의 나도 억울한 것이다. 지난밤 을은 혁명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나를 달래고, 할 수 있어. 너는 대단하잖아라고 말해주고 토요일에는 갑을 신경 안 쓰고 일요일엔 갑을 걷어차버린다. 하루쯤은 갑의 눈치를 안 봐야지 숨통이 트이지 않겠는가 남의 신경도 스트레스지만 나의 신경은 24시간 계속이다. 그럴 땐 아예 갑의 눈치는 안 보고 하루 종일 누워도 양심이 찔리지 않는 날을 나에게 주는 거다.
'책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 아무튼 반려병; 사실 나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말 (0) | 2021.02.10 |
---|---|
16. 내가 말하고 있잖아; 사실 난 선량한 차별주의자인가 (0) | 2021.02.07 |
14. 김미경의 리부트 ; 코로나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할까? (1) | 2020.07.06 |
13. 선물(the present) ; 나는 현재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0) | 2020.06.19 |
12. 이지성의 꿈꾸는 다락방; 내가 꿈꾸는 삶은 현실이 된다. (0) | 2020.06.18 |
댓글